차라리 그것은 거대한 흉기였다. 지나친 과장일까?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는 촐라체, 그것은 더 이상 산이 아니었다. 적어도 필자의 눈에 처음 비친 촐라체는 이미 동경의 대상도 아니었고 외경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거인이었다. 박정헌, 최강식, 두 젊은 산악인들의 꿈과 미래를 빼앗고는 정말 아무 일 없었던 듯 고개를 외로 꼰 채 버티고 서 있었다.

한국에서 10여일, 카트만두를 떠난 지 6일 만에 마침내 도착한 촐라체 북벽 베이스캠프. 듣던 대로 촐라 북벽은 날카롭고도 높았다. 겨울 내내 햇살 한줌 들지 않는 그곳은 태고의 그림자를 켜켜이 감춘 채 인간을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아니, 인간 따위는 전혀 관심도 없는 듯 하늘을 향해 오만하게 솟아 있었다. 첫 느낌은 그랬다.

박정헌의 배낭을 찾아 떠난 진주MBC 다큐멘터리 원정대

지난 1월, 박정헌 최강식은 촐라체 북벽 등정에 나섰다. 최소의 장비만으로 동계 시즌에 감행한 등정이었다. 사흘간의 사투 끝에 정상에 도달한 두 사람은 그러나 하산 도중 불의의 사고를 겪었다. 최강식의 추락으로 둘은 함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갈비뼈가 부러진 박정헌, 양 다리 골절의 최강식, 그러나 이들은 다시 사흘간의 사투 끝에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세계 산악계는 두 산악인의 생환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속에서 꽃핀 산악인의 인간애와 동료애는 큰 감동을 던졌다.

그러나 대가는 엄청났다. 박정헌은 동상으로 여덟 손가락을 절단하는 대수술을 받았고 최강식 역시 손가락과 발가락 대부분을 잃는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또 하나, 그들은 탈출하면서 카메라가 담긴 배낭을 버렸다.

그들의 기록이 담긴 카메라가 들어있는 배낭이었다. 박정헌은 자신들의 배낭에 유난히 애착을 보였다. 그것은 단순히 등정 기록을 되찾겠다는 의미 이상으로 보였다. 어쩌면 자신의 설산과의 모든 인연의 끈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는 듯 했다.

진주MBC(사장 김영철)가 발 빠르게 나섰다. 이들의 등정과 박정헌의 배낭 되찾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기로 한 것이다. 필자는 제작진의 원정대장으로 촐라까지 온 것이었다. 제작진은 최소 규모로 꾸려졌다. 연출 심길보, 촬영 김정근, 그리고 등반대장 오두환. 현지 셀파와 포터들로 이루어졌다.

촬영은 박정헌의 루트를 그대로 따르는 것을 기본으로 하기로 했다. 그래서 카트만두에 도착한 직후 필요한 행정절차를 밟은 후 촐라로 향하는 카라반을 시작했다. 루크라까지 항공기로 이동한 후, 팍딩, 남체, 텡보체, 팡보체, 페리체를 지나 촐라 북벽 베이스캠프까지 이어지는 카라반, 제작진의 고소 적응을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예상외로 스텝들은 고소 적응을 무리 없이 소화해내고 있었다. 길 위에서 만난 네팔인들은 박정헌, 최강식 두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사고와 기적같은 생환 소식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4월 13일 마침내 촐라체 북벽 베이스캠프까지 제작진은 무사히 도착했다.

신체 일부를 빼앗아 갔던 촐라체 북벽

촐라체 주변은 조용한 가운데서도 분주했다. 슬로베니아 팀 3명이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는 촐라를 노리고 있었고, 스위스 산악인 울리스탁 역시 촐라를 오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불빛 하나에 의지하여 거벽에 붙은 모습은 아름다웠다.

인근 로부제 서봉에는 한국 로부제서봉팀(대장 강성우)이 등반을 하고 있었다. 산이 있어 그곳으로 오른다는 여전히 어려운 철학을 지닌 산악인들이다.

촐라 북벽 베이스에 여장을 푼 제작진, 할 일이 태산 같았다. 며칠 있으면 박정헌이 아직 완쾌되지 못한 몸으로 이곳 촐라체로 올 것이다. 그는 헬기를 이용하여 자신이 사고를 당했던 지점에 내릴 것이다.

그리고 배낭 찾기를 시도할 것이다. 그 전에 제작진은 미리 필요한 촬영을 마치고 박정헌과 최강식을 구한 네팔인(다와 누루 셀파. 일명 야크 할아버지 가족)도 섭외해두어야 한다. 필요한 사람들의 인터뷰도 마쳐야 한다. 그리고 한국과의 연락도 수시로 해야 한다.

다행히 위성전화기는 상태가 좋다. 박정헌이 카트만두에 도착하는 날짜에 맞춰 일부 스텝은 다시 카트만두로 하산 할 것이다. 박정헌의 카트만두 상황 촬영을 위해서이다. 심길보 PD와 김정근 카메라 감독이 카트만두로 내려간 사이, 오두환 등반대장과 필자는 박정헌씨 사고 지점 부근에 또 하나의 베이스캠프를 설치해야 한다. 제작진이 합류하면 그곳으로 이동해 본격적인 배낭 찾기를 해야 한다. 안전을 위한 픽스 로프도 충분히 설치해야 한다. 오대장이 그 일을 맡고 필자는 북벽 베이스캠프를 지켰다.

촐라 북벽 베이스캠프에서의 일주일, 그것은 바쁜 와중에도 문득문득 절대 고독을 만나는 기회이기도 했다. 온 세상이 정지한 듯 한 공간과 시간, 박정헌과 최강식, 저들은 이 질식 할 듯한 고독 속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촐라 북벽 베이스캠프에서의 생활, 필자는 매일 새벽 기도를 올렸다. 그것은 날씨에 대한 기원이었다.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배낭을 찾아 전 스텝이 안전하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히말라야 신이 날씨를 허락해주어야 한다.

박정헌과 심길보, 김정근씨가 루크라에서 헬기를 이용, 북벽 베이스캠프로 오기로 한 4월 20일. 약속된 시간이 1시간 반이나 지나도 헬기가 오지 않아 연락을 하니 헬기 기장이 사라져버렸단다. 포기를 하고 있는데 점심 때부터 날씨가 급변해 눈이 내린다. 불행 중 다행이다. 이 또한 신의 뜻이려니…. 하루가 기다림과 초조감의 연속이었다. 내일은 날씨가 화창해지길 신께 기원했다.

다음날 아침 6시 35분, 파란 하늘을 가르며 요란한 헬기 소리가 들렸다. 착륙한 헬기에서 손에 붕대를 감은 박정헌과 심길보, 김정근씨가 나타난다. 촐라 북벽을 바라보며 박정헌은 한동안 입을 다문다. 만감이 교차하리라. 자신의 산악 인생을 걸고 들어섰던 북벽, 천신만고 끝의 등정 이후 당한 불의의 사고, 저 산이 빼앗아 가버린 자신의 신체 일부, 박정헌은 산을 원망하고 있을까? 산을 원망한다는 것은 자신의 지난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일 텐데….

1시간 반의 짧은 촬영 이후 헬기는 로체 남벽으로 향한다. 필자도 동승한다. 그곳은 산악인 박정헌이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곳이다. 직벽 3000미터의 로체 남벽을 오르는 것을 자신의 지표로 삼았던 그였다. 채 10분이 걸리지 않은 비행, 그리고 로체 남벽 베이스캠프 착륙, 거대한 직각 앞에 인간은 왜소하다.

박정헌이 아득한 시선으로 로체 남벽을 올려다본다. 아니 그것은 형언하기 어려운 갈망을 담은 눈빛이었다. 정말 저곳은 이제 가지 못하는 곳인가? 그의 감회를 담은 인터뷰를 마치고 헬기는 다시 일행을 태우고 박정헌과 최강식을 구해준 야크 노인을 만나기 위해 비행했다. 박정헌을 만난 다와 누루 셀파(68세)는 덥석 그를 안아준다. 박정헌 역시 그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생명을 사이에 두고 만난 두 사람이 아니었던가?

히말라야 여신의 품으로 사라진 배낭

일정은 빡빡했다. 헬기 사용료도 문제지만 언제 기상이 심술을 부릴지 모르는 상황, 헬기는 일행을 태우고 다시 떴다. 박정헌이 창밖으로 자신의 사고지점과 배낭을 버린 곳을 가리킨다.
“형! 저기 보이죠? 바로 저 지점입니다. 그런데 지형이 많이 변했네요. 배낭을 못 찾을 수도 있겠는데….”

헬기가 직접 착륙하기에는 무리이다. 몇 번이고 선회를 하고 확인을 한 후 헬기는 우리를 촐라체 남서벽 베이스캠프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박정헌은 헬기와 함께 루크라로 철수한다. 사뿐사뿐 누볐던 길을 버려두고 헬기에 의존해야 하는 자신을 그는 받아들이고 있을까?

전 대원이 다시 합류한 촐라체 남서벽 베이스캠프에서 밤을 맞는다. 이제 남은 것은 배낭을 찾는 일과 박정헌의 하산 루트를 따르며 촬영 하는 것, 과연 배낭은 찾을 수 있을까? 젊은 산악인들의 꿈과 희망이 담긴 그 배낭, 그들의 생명을 살렸고 그들의 생명을 위협했던 특별한 상징 배낭을 찾을 수 있을까?

배낭의 행방에 대해서는 촬영 이전부터 수많은 ‘설’이 나돌았다. 고가의 카메라를 탐낸 현지 셀파들이 벌써 수거해 가버렸다는 설, 눈이 많이 와서 셀파들은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는 설, 어쩌면 눈에 쓸려 내려가 아득한 빙하 속으로 영영 사라버렸을 거라는 추측 등등. 기대와 걱정 속에 잠 못 이루는 밤은 지루했다.

새벽, 촐라 머리끝에 달이 하얗게 걸려있다. 히말라야의 달은 지구 다른 곳의 달과 다르다는 것이 아직도 순진한 필자의 믿음이다. 달은 더 이상 깎아낼 수 없을 만큼 하얗다. 서산에 달빛이 있는데도 하늘 한가운데로는 은하수가 흐른다. 새벽 5시 10분. 오두환 대장과 촬영팀을 배낭 내려놓은 곳으로 올려 보냈다. 단단히 장비를 갖추고 몇 번이고 안전을 당부했다.

두 시간 후, 촬영팀의 첫 무전이 왔다. 그리고 다시 두 시간여 후 배낭 버린 장소에 무사히 도착, 그러나 배낭은 없다는 소식이었다. 오두환 등반대장은 찾을 때까지 찾아보겠다고 했으나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배낭은 영원히 히말라야 여신의 품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젊은 두 산악인의 꿈과 희망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여신이 탐을 냈다고. 그렇게 자위하기로 했다.

모든 촬영을 마치고 촐라체 베이스캠프를 떠나는 날, 나는 자리에 누워 오랫동안 생각했다. 촐라를 돌아보며 내려갈 것인가? 아니면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떠나 버릴 것인가? 배낭을 찾지 못했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몸에는 열이 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감기약까지 챙겨 먹었다.

뒷정리를 완벽하게 마치고 드디어 베이스캠프를 나섰다. 기억이 없다. 돌아오면서 촐라 북벽을 바라보았는지 말았는지, 지금은 기억에 없다. 다만 여전히 선명한 것은 한국의 두 산악인의 꿈이 그곳에 묻혀 있다는 것, 그들의 못다한 산에 대한 사랑과 동경도 함께 묻혀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그 사랑과 동경이 새로운 꽃으로 피어날 것이라는 것, 그것만이 내가 촐라 북벽을 떠나며 가진 기억의 전부이다. [글 사진｜유동훈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