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0일, 마감을 앞둔 사무실로 촐라체(Cholatse·6440m) 원정대 박정헌(35세·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 대성정공), 최강식(26세·진주 경상대 체육학과 4학년 휴학)씨의 사고소식이 전해졌다.

경남연맹에 확인 결과, 약간의 손발 동상과 다리골절인 것 같다며 아직 정확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정상 등정 여부도 확인되지 않았을 뿐더러 현재 카트만두 병원에 있다고만 전했다.

그러나 3일 후, 조난을 당해 손발 동상이 아주 심하며 현재 경희의료원으로 옮겨와 입원 중이라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17일 수술을 하루 앞두고 박정헌(35세)씨를 찾았다. 한창 산소치료 중이었다.
“빨리 수술하고 완쾌 되는대로 장비 찾으러 가야죠. 정상 사진이 담긴 카메라는 물론이고 모든 장비를 다 놔두고 내려왔잖아요.”

선배들이 찾아올 때면 “빨리 수술할랍니다”고 말하던 박씨는, 더 지켜볼 수 없냐는 기자의 말에 단호한 뜻과 함께 멋적은 웃음을 짓는다.
“촐라체 북벽은 정말 어렵다”는 말로 말문을 열었다. 이번 등반은 성공적이었기에 만족하고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그동안 많은 인원들과 다니는 원정에서 탈피하고,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솔로등반의 첫 준비로 떠났던 등반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벽등반 체질인 박씨에게 촐라체 북벽은 시작점일 뿐이었다. 그리고 고산등반의 새로운 기술과 장비, 식량 연구를 목적을 둔 등반이기도 했다.

“벽등반이었기에 경량화에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비박장비들과 5밀리, 7밀리 55미터 로프 2동, 하켄 15개, 스크류 4개, 가스 1개 등 필요한 장비들을 가장 가벼운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남체에서 현지 구입하면서 정보 수집 및 시장 조사까지 마쳤죠.”
여태 원정을 다니면서 그렇게 준비를 꼼꼼하게 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일이 준비 및 장비체크를 했다. 그렇게 준비한 등반이었기에 깨달은 바도 크다.

“가볍다고 좋은 건 아니었어요. 가벼울수록 지지하는 힘이 약하더군요. 옛날에 직접 때려 만든 하켄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등반은 잘 마쳤는데 조난 당해서 아쉽죠. 그런데 그건 우리 힘으로 안되는 일이니까요. 어쩔 수 없잖아요.”

박정헌, 최강식씨는 1월 13일 새벽 3시 첫 등반에 나섰다. 365일 햇빛이 들지 않는 벽인 탓에 추위를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그러나 생각보다 경사와 난이도가 높았다. 또한 설벽도, 빙벽도 아니어서 피켈을 찍을 수도, 스텝을 만들 수도 없었다. 14일 정상에 선후 저녁에 내려온다는 계획은 16일까지 늦춰졌다.

바위는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아 오버행이 돼버렸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오버행이 나올 때마다 섬뜩했다. 비박 시, 크램폰을 벗어야했을 때는 더욱 짜릿했다. ‘만약 이 벽에서 한 명이라도 크램폰을 떨어뜨린다면 다신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등반하는 동안 한 번도 벗지 못했다.

“가장 무서운 게 타박에 의한 동상이었어요. 동상을 안고 살았지만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높은 난이도 탓에 얇은 장갑을 끼고 선등을 섰다. 왼손엔 가볍고 길이가 짧은 일자형, 오른손엔 커브형 바일을 썼다. 상대적으로 타박상을 많이 입은 왼손 동상이 더 심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이기고 고독감과 싸워가며 1월 16일 11시 박정헌씨는 경남연맹 후배 최강식씨와 북벽 한국 초등을 이루어냈다.

“정상에서 찍은 사진은 겨우 3컷이에요. 저 한 컷, 강식이 한 컷, 정상사진 1컷. 바람이 많이 불어서 15분만에 바로 내려왔습니다.”
하산은 서면. 왼쪽으로 내려가야 할 것을 오른쪽으로 잘못 내려섰지만 안자일렌을 하고는 그냥 갔다. 대체로 양호한 길이었다. 오후 5시면 사람 있는 곳에 닿을 수 있었다.

“형! 떨어져요.”
발을 헛디딘 최강식씨가 순식간에 50미터 크레바스에 빠졌다. 재빨리 바일로 고정시켰지만 그 충격으로 박씨는 정신을 잃었다. 최씨의 짓누르는 무게로 숨이 막히자 겨우 깨어났다. 이미 안경과 피켈은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최씨는 떨어지면서 다리 골절상을 당했다.

“만감이 교차했어요. 다리 부러진 사람을 어떻게 올리고 어떻게 데려갈지…. 로프를 풀고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추락 충격으로 왼쪽 갈비뼈가 부러진 박씨는 1시간의 사투 끝에 후배 최씨를 올렸다. 살았다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그러나 부상당한 몸으로 내려오기란 말로 표현 못할 고통이었다. 제 한 몸 가누기도 힘들어 17일 11시경 피켈만을 남겨두고 배낭을 모두 버렸다.

“그날 어두워지자 비박을 했어요. 잠시 잠들었는데 저승사자가 데리러 왔더라구요. 남녀가 차를 가지고 오더니 이걸 타면 롯지로 빨리 내려갈 수 있대요. 세 사람이 더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실제로 내려오지 못했어요.”
그 다음날이 되자 최강식씨는 꼼짝도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 박씨만 야크 롯지로 향했다. 힘겹게 3시간여를 내려와 롯지에 도착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문을 부수고 들어오자마자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은 무너졌다. 3시간여를 잠든 박씨는 시커먼 물체에 깜짝 놀라 깼다. 다행히 최강식씨였다.

“날씨가 안좋고 눈이 많이 내렸어요. 강식이가 이렇게 있다간 죽을 것 같아 제 발자국따라 내려왔대요. 고맙게도 이 녀석이 ‘버려두고 온 죄’는 면하게 해준 셈이죠.”
그러나 이미 손가락이 말라가고 있었다. 1주일만에 10킬로그램이 빠지면서 몸에 수분이 없자 동상은 급속히 진행되었다. 최강식씨는 4박 5일만에 처음으로 이중화를 벗어보지만 발이 퉁퉁 부어 그것마저 쉽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박씨가 최씨보다 동상이 더 심했다.

몇 해 전 인터뷰에서,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와 같이 로프를 끊어야할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박씨는 아래와 같이 답했었다.
“히말라야에서 죽는 것은 행복이지요. 순간이기도 하고, 고소에서는 사고 능력이 떨어지니까. 아주 편안한 죽음이 될 것 같아요.”

그러나 그는 로프를 끊지 않고 악몽과 같은 시간들을 이겨내며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후배와 함께 살아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병문안을 왔어요. 왜 왔을까 생각해봤더니, 그들이 더 이상 저의 활동을 볼 수 없다는 것과 등반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오는 것 같더군요. 그런 분들에게 더 좋은 등반을 보여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기만 하죠.”

“소주잔을 기울일 수 있는 손가락을 남겨준 것만으로 다행이에요. 20년 다녔으니 잘 썼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무사히 돌아왔다면 또 거벽을 찾았을테고 그럼 언제, 어느 낭떠러지로 떨어질지 모르는 거잖아요. 이것으로 벗어나게 해준 것 같습니다.”
인터뷰 중 그동안 감고 있던 붕대를 풀고 돌아왔다. 웃음 지으며 씩씩하고 밝은 모습을 보여주던 그의 표정이 어둡다. 굳게 마음먹고 내린 결정이지만, 등반가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엄지손가락 두 개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발가락을 잃는 아픔은 어쩔 수 없다.

‘산악계의 기린아’, ‘한국의 머메리’, ‘국내 최고 거벽등반가’ 등으로 불리며 늘 새로운 등반을 추구해온 박정헌씨. 그에게 포기란 없다. 고집과 오기와 집념으로 그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그’만의 산을 찾아 다시 오를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글｜오혜정 기자 사진｜정종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