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한테 우리 사귀는 거 언제 말하지?” “친구들 언제 보여줄 거야?” “부모님께 언제 인사드릴 거야?” “우리 결혼은?” 등에 대한 그의 대답, “언젠가 해야지”.
우리는 영어 시간에 배웠다. ‘someday’는 막연한 미래를 나타낸다는 것. 그의 가까운 미래에는 그러한 계획이 없다. 어쩌면 그런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떠올리기조차 싫어 멀리멀리 우주 한가운데로 미뤄놓은 상태다.
“여자친구를 이제까지 제대로 사귄 적이 없어요.
‘당신이 내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사귀는 여자친구가 될 것 같아요’라고 해석하지 말 것. ‘제대로 사귀어본 적이 없다’는 말은 ‘제대로는 아니어도 여자를 만난 적은 많다’라는 말이 될 수 있는 것. 즉, ‘나는 여자와 진지한 관계를 갖고 싶지 않다’는 말일 수 있다.
“나는 원래 여자친구 사귀면 꼭 집에 데려다줘요. 그러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그의 여자친구가 되면 공주, 아니 여왕 대접을 받을 것 같았는데 웬걸. 그는 되레 ‘나쁜 남자’였다. ‘원래’ ‘꼭’ ‘한 번도 안 그런 적이 없다’고 했는데, 왜 이럴까 싶다. 그냥 논리적으로 추론해보면, 그는 당신을 ‘여자친구’의 카테고리에 넣지 않았다는 거다. 후에 그가 옛 여자친구들을 카운팅할 때 당신이 그 손가락 안에 들 가능성은 13% 정도?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요.”
포인트는 두 군데. ‘내가’라는 말을 강조한다면 ‘내가 연락을 했으면 했지 당신은 나에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나중에’에 방점이 찍힌다면, 이것 역시 ‘someday’다. 그에게는 당신에게 연락하는 것이 아주 막연하기만 하다.
친구들이, 혹은 강의실에서 처음 만난 그(녀)가 하는 말 중에도 ‘으레 하는 말’이 있다. 순진한 당신은 곧이곧대로 듣는다. 다음은 달팽이관을 통과하기 전에 걸러내도 괜찮은 말들.
‘우리 진짜 이번에 놀러 가자’는 이야기에, ‘가자, 진짜 가자’ 호들갑 떨며 맞장구.
일정상, 경제 여건상, 가족 상황상, 건강상 등 각종 사적인 이유로 파토나기 쉬운 공허한 외침들. 그중 추진력이 강한 사람이 있다면 간혹 정말 떠나게 되기도 하나, 우유부단한 ‘사탕발림녀’는 ‘와~ 재밌겠다’를 (심지어 그 전날까지) 외치다 ‘못 갈 것 같아. 미안’이라는 문자를 남기고 잠수를 탄다지.
“이 호피 무늬 구두 예쁘긴 한데, 네 이미지랑은 어울리지 않는 거 같아. 아니, 그냥 그렇다고.”
비판적인 말을 절대 입에 담지 않은 채 끝까지 순박하고 공손한 태도로 상대를 비난하려고 노력한다. 긍정적인 말 뒤에는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라는 표현이 덧붙지 않는다. 이런 맥 빠지는 표현으로 부정적 의견의 세기가 완화되는 것은 아닌데, 괜히 약만 올리고 있다.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이 “너무 멋져요! 너무 좋아요!”를 연발한다. 가끔 본인이 객관적으로 인지하는, 별로 그다지 훌륭하지 않은 외모를 극찬하기도 한다.
실제로 당신이 너무너무 멋지거나, 너무너무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누구에게나 그런 단어를 쓸 가능성이 높다. “저는 지식이 잡다한 사람을 좋아해요. 같이 수다 떨면 뭔가를 배우는 것 같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요. 당신과 시간을 보내면 기분이 참 좋아지네요.” 구체적인 행동이나 업적에 대해 칭찬을 하고 호감을 표하는 것이 제대로다.
“진짜 솔직히 나 어제 그냥 잤어. 오늘 시험은 진짜 백지 내야 해.”
늘 솔직한 사람은 ‘솔직히’ ‘터놓고 말하면’ ‘사실은 말이야’라는 부사(구)를 쓰지 않는다. 되레 솔직하지 않은 사람인 경우가 많다. 내가 원하는 만큼 잘하지는 못할 것 같다는 어리광일 게다. 간혹 정말 생짜 상태일 수도 있으니, 무조건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지는 마라.
“조금 늦을 듯. 5분 후 도착해. 두 정류장 남았어.”
지금 그녀는 다섯 정류장 전이다. 당신에겐 문자가 도착할 즈음엔 두 정류장 전일 것이라는, 현대 통신 기술의 속도를 과소평가한 계산 끝에 문자를 보낸 것이다. 10분 정도는 여유를 가지는 센스를 발휘할 것.
“난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어. 왜 이 모양일까. 넌 정말 완벽한 것 같아. 부러워.”
정말 자존감이 낮아, 이 모양인 자신이 싫어서 하는 말이라면, 토닥토닥해줘야겠지. 하지만 늘 대화가 이렇게 진행된다면 습관성 자기비하 발언임을 의심해볼 것. 특히 자신을 깎아내린 뒤 칭찬이 따라붙으면 그는 상대방을 추켜세우면서 다가가는 스타일이다. 사람을 대하는 법을 몰라 택한 접근법. 물론 처음에는 기분 좋지만, 나중에는 짜증이 솟구칠 수도 있을 거다. 왜 항상 저럴까 싶으니.
“정말 미안한데요, 내 생각은 달라요.”
정말 미안해서 붙이는 어두일까. 혹 정말 미안하다면 애초에 그 말을 삼키면 되는 거다. 내 말도 하고 싶고, 자연스럽게 끼어들어야겠고, 그러면서도 사려 깊은 척하기 위해 상투적으로 내뱉는 말이다. 사과와 감사와 용서를 구하는 말을 습관적으로 낭비하지 말지어다.
